야살의 책 5
창세기의 주요 인물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 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근간을 마련한 요셉은 대단히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이 참고하라 정도로 신뢰도가 높은 야살의 책에는 요셉의 이야기 또한 매우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살의 책이 기록하고 있는 요셉과 그의 형들에 관한 스토리를 이야기해드리려고 합니다.
요셉의 나이 서른, 마침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라고 하니, 애굽의 왕, 파라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세가 약한 직위인 듯 보이지만, 사실 요셉의 총리직은 바로의 지위에 버금가는 엄청난 권세를 누리는 직위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소개로 아내를 얻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많이 흘러, 그가 해석해준 바로의 꿈 대로 7년 풍년이 지나, 7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이 흉년은 이집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지역, 구스 지역을 포함하는 이집트 주변의 모든 지역에 임한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애굽에 판 형들도 곧 애굽을 찾아올 것을 예상합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요셉이 형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묘사가 나와 있지 않지만, 사실 정황상 요셉이 가나안 지역까지 극심한 가뭄이 있던 때에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을 방문하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어쨌든, 요셉은 하인들이 아니라, 형들이 직접 찾아올 것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야살의 책은 당시, 크던 작던 어떤 민족이 어떤 다른 나라를 방문하여, 도움을 구할 때는 반드시 우두머리의 아들들이 직접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통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요셉은 형들을 만나기 위해, 부하들에게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온 모든 사람들은 본인과 가족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매일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합니다. 이 무렵,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곡식을 구해 오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자칫 외부 침입자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함께 들어가지 말고, 애굽에 있는 열 성문으로 각각 흩어져, 들어가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야곱의 형들은 애굽을 향해 떠나는 여정에서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을 기억하며, 애굽에서 요셉을 찾아 데려오자는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의 형들을 너무나 악하고 파렴치한 자들로 여기는데, 야살의 책은 그들이 당시에 그들이 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애굽에 입성하여, 애굽 지역 전체에 몸을 파는 남자 여자들이 있는 장소들을 수색합니다. 야살의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요셉이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노예로 팔려갔다면, 아마도 창기로 팔려가지 않았을까 예상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요셉은 열 명의 형 모두가 각각 다른 성문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그들이 애굽을 염탐하려 온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시비를 겁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읽을 때, “요셉이 고작 열명 밖에 되지 않는 형들을 스파이로 몬 것은 너무 억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행임에도 불구하고, 열 개의 문으로 각각 애굽을 입성한 사실이 밝혀졌다면, 충분히 의심을 삼을 꼬투리를 제공할 만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므온이 남게 되고,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스파이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베냐민을 데리러 고향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야곱은 바로에게 간청하는 편지를 써서, 베냐민과 다른 아들들을 다시 애굽에 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은 또 다시 형들과 마주합니다. 베냐민을 본, 요셉은 눈물을 감추기 어려워 자리를 피합니다. 그리고 만찬을 베풀고, 베냐민을 자신의 식탁에 앉힙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동생 베냐민에게만 밝힙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이렇게 다짐합니다. 만약 베냐민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형들에게 엄포를 놓을 경우, 형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베냐민을 데려가려는 의지를 보이면, 자신이 요셉임을 밝혀 오해를 풀 것이고, 반대로 형들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베냐민을 포기하고, 양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밝히지 않을 것이라 맹세합니다.
결국, 요셉은 끝까지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이에 유다가 나서서, 자신들은 스파이가 아닐 뿐 더러, 반드시 베냐민을 아버지에게 데려갈 것이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당시 애굽은 규모가 있는 나라였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세 때의 초강대국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가정 또한, 일개 대가족이 아니라, 한 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군사력이 있는 큰 부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에 그가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의 용사로 연합국과 전쟁하여 승리를 거머쥔 사건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입니다. 이에, 형들을 끝까지 스파이로 몰아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동생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요셉과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하며, 베냐민을 데려가려는 유다와 다른 형들 사이에 큰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하나님이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미리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는 말을 하며, 형들과 화해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이 형들과 조우한 사건을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야살의 책을 참고하여, 성경 창세기를 깊이 묵상해보면, 이 시간이 그저 용서의 사건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한 약속의 자녀들을 향한 변함없으신 사랑과 인도하심입니다. 굳이, 요셉의 장점을 자랑한다면, 그의 용서와 배려가 아니라, 그가 그러한 상처와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자신이 당한 고난과 억울함조차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뉘우치는 것을 확인한 즉시, 그 전의 일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믿는 믿음으로 상황을 납득하고, 마음의 쌓인 감정을 비워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곧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개인의 감정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괜찮다고 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니, 문제가 있어도 문제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섭리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시니, 그가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시니, 분노할 일도 억울할 일도, 상처받아 괴로워할 일도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야살의 책 5
창세기의 주요 인물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 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근간을 마련한 요셉은 대단히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이 참고하라 정도로 신뢰도가 높은 야살의 책에는 요셉의 이야기 또한 매우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살의 책이 기록하고 있는 요셉과 그의 형들에 관한 스토리를 이야기해드리려고 합니다.
요셉의 나이 서른, 마침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라고 하니, 애굽의 왕, 파라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세가 약한 직위인 듯 보이지만, 사실 요셉의 총리직은 바로의 지위에 버금가는 엄청난 권세를 누리는 직위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소개로 아내를 얻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많이 흘러, 그가 해석해준 바로의 꿈 대로 7년 풍년이 지나, 7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이 흉년은 이집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지역, 구스 지역을 포함하는 이집트 주변의 모든 지역에 임한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애굽에 판 형들도 곧 애굽을 찾아올 것을 예상합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요셉이 형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묘사가 나와 있지 않지만, 사실 정황상 요셉이 가나안 지역까지 극심한 가뭄이 있던 때에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을 방문하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어쨌든, 요셉은 하인들이 아니라, 형들이 직접 찾아올 것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야살의 책은 당시, 크던 작던 어떤 민족이 어떤 다른 나라를 방문하여, 도움을 구할 때는 반드시 우두머리의 아들들이 직접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통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요셉은 형들을 만나기 위해, 부하들에게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온 모든 사람들은 본인과 가족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매일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합니다. 이 무렵,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곡식을 구해 오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자칫 외부 침입자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함께 들어가지 말고, 애굽에 있는 열 성문으로 각각 흩어져, 들어가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야곱의 형들은 애굽을 향해 떠나는 여정에서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을 기억하며, 애굽에서 요셉을 찾아 데려오자는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의 형들을 너무나 악하고 파렴치한 자들로 여기는데, 야살의 책은 그들이 당시에 그들이 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애굽에 입성하여, 애굽 지역 전체에 몸을 파는 남자 여자들이 있는 장소들을 수색합니다. 야살의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요셉이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노예로 팔려갔다면, 아마도 창기로 팔려가지 않았을까 예상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요셉은 열 명의 형 모두가 각각 다른 성문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그들이 애굽을 염탐하려 온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시비를 겁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읽을 때, “요셉이 고작 열명 밖에 되지 않는 형들을 스파이로 몬 것은 너무 억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행임에도 불구하고, 열 개의 문으로 각각 애굽을 입성한 사실이 밝혀졌다면, 충분히 의심을 삼을 꼬투리를 제공할 만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므온이 남게 되고,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스파이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베냐민을 데리러 고향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야곱은 바로에게 간청하는 편지를 써서, 베냐민과 다른 아들들을 다시 애굽에 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은 또 다시 형들과 마주합니다. 베냐민을 본, 요셉은 눈물을 감추기 어려워 자리를 피합니다. 그리고 만찬을 베풀고, 베냐민을 자신의 식탁에 앉힙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동생 베냐민에게만 밝힙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이렇게 다짐합니다. 만약 베냐민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형들에게 엄포를 놓을 경우, 형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베냐민을 데려가려는 의지를 보이면, 자신이 요셉임을 밝혀 오해를 풀 것이고, 반대로 형들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베냐민을 포기하고, 양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밝히지 않을 것이라 맹세합니다.
결국, 요셉은 끝까지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이에 유다가 나서서, 자신들은 스파이가 아닐 뿐 더러, 반드시 베냐민을 아버지에게 데려갈 것이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당시 애굽은 규모가 있는 나라였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세 때의 초강대국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가정 또한, 일개 대가족이 아니라, 한 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군사력이 있는 큰 부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에 그가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의 용사로 연합국과 전쟁하여 승리를 거머쥔 사건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입니다. 이에, 형들을 끝까지 스파이로 몰아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동생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요셉과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하며, 베냐민을 데려가려는 유다와 다른 형들 사이에 큰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하나님이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미리 자신을 애굽으로 보냈다는 말을 하며, 형들과 화해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이 형들과 조우한 사건을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야살의 책을 참고하여, 성경 창세기를 깊이 묵상해보면, 이 시간이 그저 용서의 사건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한 약속의 자녀들을 향한 변함없으신 사랑과 인도하심입니다. 굳이, 요셉의 장점을 자랑한다면, 그의 용서와 배려가 아니라, 그가 그러한 상처와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자신이 당한 고난과 억울함조차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뉘우치는 것을 확인한 즉시, 그 전의 일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믿는 믿음으로 상황을 납득하고, 마음의 쌓인 감정을 비워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곧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개인의 감정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괜찮다고 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니, 문제가 있어도 문제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섭리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시니, 그가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시니, 분노할 일도 억울할 일도, 상처받아 괴로워할 일도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