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것이라 행14:19,22
우리가 한 영혼의 전도에 이르러면 많은 시련에도 인내해야합니다 특히 코뮤니티 선교에 있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지요.
지금 영어 회화 시간에 때때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접 , 영어공부가 필요하였습니다.
제가 영어강사로 있으면 선생의 권위로 이끌겠는데 그저 회원이다 보니까 아무때나 복음을 전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이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가 노력한만큼 능력을 행하십니다 . 전도를 위한 희생이 그만큼 값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은 누구에게건 자신의 생명조차 아낌없이 주는 차원의 전도였지요.
전도 여행을 하든지 한 곳에 머물든지 희생과 사랑의 영성이 동일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히로미상과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함께하였습니다.
지난주는 홀로 하우스템포스 호텔에 예약하여 하루지내고 왔다는군요.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남자 간호사와 사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하로미상이 연약하기는 하지만 성격이 착하고 영민하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학교도 다니고 온전히 사회에 적응할 날을 기대하게 됩니다.

어제는 김남인 간사님부부와 점심을 나누고 저녁에는 김용민 목사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김용민 목사님과는 20여년 전에 후꾸오까에서 저와 김용민 목사님만 선교사로 만나 뵙게 되었는데
감회가 새롭군요 먼저 선교의 길을 걸어간 자로써 책임감도 느껴지는데 우리가 끝까지 선교의 길을 걸으며
후배 동역자님들에게 모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범이 되려면 무엇보다 품행이 방정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그 외 여러가지 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지 않아야하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사역의 열매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걸어간 선교의 길이 주님의 뜻에 합한 길이었다는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풍부한 경험 속에 적절한 조언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이 세상에서 말하는 실력이 필요한데 주님께 구하면 여러 은사를 후하게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소흘히 하면 공연히 대인 기피증이 생기고 사역이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은 스승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만큼 공부하여 되었다 싶으면
스승님은 저만치 홀로 계시는 산과 같은 존재라 넘사벽이라 며 존경하였습니다.
공자는 제자가 질문하면 무엇이든지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평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김용민 목사 사모님께 논어 강의 30분 했습니다만 잘했는지 모르겠군요. 가정에서는 자녀와 아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목숨을 다해 선교에 임하지만 가정은 피폐해지고 아내는 속병이 든다면 결코 모범이 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게 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선교프레임(선교를 앞세워 함정에 빠지게 하는 영)때문인데 앞서 제가 열거한 말씀을 참고한다면
그토록 집요하게 다가오는 선교프레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소자여 어찌하여 시경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시는 감흥을 일으키고 통찰력을 갖게하고
동호인을 모이게하고 가탄 없이 정치,사회에 비판을 하게한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를 군주에게는 충성스럽게한다.
논어에서 설명하는 시론은 지금 현대시론보다 훨씬 광범위하군요.
현대시론이 감성의 절묘한 비유적 표현을 존중함에 비하여 문화,정치,사회 모든 영역에 시에 대한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시는 감흥을 불러 일으킵니다. 절묘한 비유적 표현은 의미를 새롭게 각인시키지요.
우리 주님도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성경구절이 생각납니다.
제시론은 비유로 표현하되 그의미가 간명해야 합니다. 또 시를 통해 통찰력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한시는 세대를 통한 문화 문예의 축적이지요. 그리고 당시 정치 사회의 실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경에 한가로이 강변에서 울고 있는 물새는 요조숙녀와 같아서 군자가 사모하는 배필과 같도다 라는 시가 있지요.
이시가는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에 지어진 시가인데 요조숙녀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과거 문인들과 호흡은 물론 현대 동호인이 무리를 이루며 공동집필하는 것도 시의효용이 되겠습니다.
사고와 뜻을 나누고 모으는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기탄 없는 비판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이대올로기에서 보이는 정치적인 통제 없이 시의 세계에서는 사회와 정치에 관해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의 효용성에 대해 정확하고 광범위한 정의로 인해 이어록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것이라 행14:19,22
우리가 한 영혼의 전도에 이르러면 많은 시련에도 인내해야합니다 특히 코뮤니티 선교에 있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지요.
지금 영어 회화 시간에 때때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접 , 영어공부가 필요하였습니다.
제가 영어강사로 있으면 선생의 권위로 이끌겠는데 그저 회원이다 보니까 아무때나 복음을 전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이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가 노력한만큼 능력을 행하십니다 . 전도를 위한 희생이 그만큼 값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은 누구에게건 자신의 생명조차 아낌없이 주는 차원의 전도였지요.
전도 여행을 하든지 한 곳에 머물든지 희생과 사랑의 영성이 동일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히로미상과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함께하였습니다.
지난주는 홀로 하우스템포스 호텔에 예약하여 하루지내고 왔다는군요.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남자 간호사와 사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하로미상이 연약하기는 하지만 성격이 착하고 영민하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학교도 다니고 온전히 사회에 적응할 날을 기대하게 됩니다.
어제는 김남인 간사님부부와 점심을 나누고 저녁에는 김용민 목사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김용민 목사님과는 20여년 전에 후꾸오까에서 저와 김용민 목사님만 선교사로 만나 뵙게 되었는데
감회가 새롭군요 먼저 선교의 길을 걸어간 자로써 책임감도 느껴지는데 우리가 끝까지 선교의 길을 걸으며
후배 동역자님들에게 모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범이 되려면 무엇보다 품행이 방정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그 외 여러가지 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지 않아야하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사역의 열매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걸어간 선교의 길이 주님의 뜻에 합한 길이었다는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풍부한 경험 속에 적절한 조언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이 세상에서 말하는 실력이 필요한데 주님께 구하면 여러 은사를 후하게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소흘히 하면 공연히 대인 기피증이 생기고 사역이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은 스승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만큼 공부하여 되었다 싶으면
스승님은 저만치 홀로 계시는 산과 같은 존재라 넘사벽이라 며 존경하였습니다.
공자는 제자가 질문하면 무엇이든지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평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김용민 목사 사모님께 논어 강의 30분 했습니다만 잘했는지 모르겠군요. 가정에서는 자녀와 아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목숨을 다해 선교에 임하지만 가정은 피폐해지고 아내는 속병이 든다면 결코 모범이 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게 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선교프레임(선교를 앞세워 함정에 빠지게 하는 영)때문인데 앞서 제가 열거한 말씀을 참고한다면
그토록 집요하게 다가오는 선교프레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소자여 어찌하여 시경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시는 감흥을 일으키고 통찰력을 갖게하고
동호인을 모이게하고 가탄 없이 정치,사회에 비판을 하게한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를 군주에게는 충성스럽게한다.
논어에서 설명하는 시론은 지금 현대시론보다 훨씬 광범위하군요.
현대시론이 감성의 절묘한 비유적 표현을 존중함에 비하여 문화,정치,사회 모든 영역에 시에 대한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시는 감흥을 불러 일으킵니다. 절묘한 비유적 표현은 의미를 새롭게 각인시키지요.
우리 주님도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성경구절이 생각납니다.
제시론은 비유로 표현하되 그의미가 간명해야 합니다. 또 시를 통해 통찰력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한시는 세대를 통한 문화 문예의 축적이지요. 그리고 당시 정치 사회의 실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경에 한가로이 강변에서 울고 있는 물새는 요조숙녀와 같아서 군자가 사모하는 배필과 같도다 라는 시가 있지요.
이시가는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에 지어진 시가인데 요조숙녀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과거 문인들과 호흡은 물론 현대 동호인이 무리를 이루며 공동집필하는 것도 시의효용이 되겠습니다.
사고와 뜻을 나누고 모으는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기탄 없는 비판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이대올로기에서 보이는 정치적인 통제 없이 시의 세계에서는 사회와 정치에 관해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의 효용성에 대해 정확하고 광범위한 정의로 인해 이어록이 유명하다고 합니다.